이수도와 마주해 있는 언덕 마을은 시방(矢方) 흔히 ‘살방’이라고 부르는데 마치 활을 쏘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처럼 이수도와 시방은 학과 활의 모양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로 볼 때 서로 겨누고 막아야만 하는 운명 속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두 곳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비석에 얽힌 사연부터 등장한다. 이야기는 조선 말엽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수도는 주변이 황금어장이고, 물도 풍부하여 시방보다 훨씬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수도에 일본인 어장이 생기면서 돈의 흐름이 좋아졌고, 시방보다 진해와 마산, 부산으로 가는 뱃길이 유리하여 번성을 누렸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회유하는 어족자원이 줄어들면서 점차 어획량이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시방에 비해 고기도 덜 잡히고 살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여건을 보자면 이수도가 더 잘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자 이수도 사람들이 시방을 질시했고 더 잘 살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때마침 풍수지리에 능한 도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수도의 학이 시방의 화살에 맞아 죽는 형국이라 방패에 해당하는 비석을 세워 막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 말대로 이수도 사람들은 시방의 화살을 막는 방시순석(防矢盾石)을 마을 뒷산에 세웠다. 그러자 정말 이수도는 부자가 되었고, 이번에는 시방마을이 쇠락해져 가는 것이었다. 이수도에 비석이 서고부터 시방이 가난해졌다 하여 시방사람들은 이수도의 비석을 부수려 했으나, 이수도 사람들이 시방사람들을 섬에 얼씬도 못하게 막았다. 그동안 다정하게 지내오던 두 마을은 이때부터 원수지간이 되었다. 고심 끝에 시방에서는 이수도의 비석을 뚫을 수 있는 쇠화살을 쏜다는 뜻의 비석을 세웠다. 이것이 지금도 남아 있는 방시만노석(防矢萬弩石)이다. ‘만노’란 쇠로 된 화살을 말한다. 이렇게 되자 처지는 다시 바뀌었다. 결국 이수도에서 쇠화살을 막을 방시만노순석(防矢萬弩盾石)을 원래의 방시순석 위에 덧세웠다. 이후, 더 이상 어리석은 싸움을 뒤풀이하지 않으려는 일단의 깨우침과 함께 화해가 이루어져 오랜 분쟁은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풍수지리 사상에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우리나라 속담과 연결된 사례다. 이수도는 어획량이 줄고 자녀교육과 교통 의료 문화 등의 열악한 사정 때문에 젊은이들이 섬을 떠나자 자연히 노령화가 되었다. 반면에 시방마을은 거제대교의 연결과 거가대교의 개통 등 교통이 월등히 좋아져서 그전보다 사는 것이 여유로워졌다. 예전에는 곧이곧대로 풍수지리설을 믿었다. 이 풍수지리설은 우주 중에서도 지구에는 일정한 기(氣)가 있는데 그것 중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기가 있는 곳을 길지라 한다. 그래서 집이나 묘 등을 만들 때 방향과 산의 모양 등의 자연 형상과 지리가 인간사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풍수지리설이 도입되어 신라 말기에 활발해졌고 고려 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비석이야기는 가난했던 시절에 서로 잘살아 보려고 하는 경쟁심이 묘하게 뒤섞여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 마을 간의 처절한 갈등은 흥미진진한 설화로 남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었고, 이제는 마을을 알리는 데 좋은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